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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의 잔잔한 이야기, 감동이 있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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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설연화
작성일 2006-03-03 (금) 19:21
ㆍ추천: 122  ㆍ조회: 3896      
IP: 220.xxx.92
나를 찾아서 /글 정채봉
나를 찾아서/정채봉

혼자 훌쩍 떠나자고 마음 먹었다.  작은 손가방에 세면 도구와 양말
을 챙겨 넣고 나자 달리 더 준비할 것이 없었다.
밖에는 비가 오고 있었다.  비 오는 주말, 혼자 떠나는 길손, 낭만
일 것 같지만 가슴 한편에 젖는 우수가 있다.
서울역 구내에 삼삼오오 모여 있는 사람들이 전에 없이 정겨워 보
였다.  나는 문득 동행을 구해 볼 생각으로 친구한테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신호만 건너갈 뿐 선뜻 받아 주는 사람이 없다.  받아 주는
이 없는 전화 벨이 문득 내 처지처럼 느껴진다.  막상 발길 닿는 대로
간다고 했지만 매표소에 이르자 역이름이 얼른 대지지가 않는다.
기껏 표를 산 것이 고향 근교의 간이역, 그곳 면소재지에서 농촌지
도원으로 일하고 있는 중학 동창이 떠올랐던 것이다.
열차에 앉아서 차창에 뿌려지는 빗방울을 우두커니 바라보다가 술
을 샀다.  옆자리의 길손에게 권했으나 거절당하고 혼자서 한 병을 비
웠다.
깜박 잠이 들었던 것 같았다.  눈을 뜨니 차창에 오후의 햇볕이 들
고 있었고 목적지가 가까워오고 있었다.
비 개인 간이역, 역장의 높이 쳐드는 신호기조차도 싱그러워 보였
다.  참새들이 작은 역사의 지붕 위에서 우짖고 있었고, 텅 빈 대합실
에는 스님이 한 분 시간표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농촌지도소를 향해 가는 도로의 양쪽 가로수가 감나무여서 이채로
웠다.  그 감나무에서는 감꽃이 막 피어나고 있었는데 비에 씻긴 포도
위에 떨어진 감꽃이 그렇게 정갈해 보일 수가 없다.
나는 유년 시절에 했던 대로 감꽃을 주워서 입에 넣었다.  약간은
떫으면서도 담백한 감꽃의 맛을 음미하면서 농촌지도소에 이르니 졸
고 있었던 듯 일직이 눈을 비비며 나왔다.
그 사람은 내가 찾는 친구가 달포 전에 발령이 나 다른 지방으로
갔다고 말했다.  나는 비로소 완전히 홀로 됨을 느꼈다.
풍향계가 가리키는 남서쪽 길로 무조건 들었다.  뜰이 넓은 여인숙
을 찾아가니 담장 귀퉁이에 활짝 핀 붓꽃이 반긴다.
나는 방의 윗목에 손가방을 던져 놓고 입은 채로 팔베개를 하고 벌
렁 누웠다.  "아아, 나는 혼자다" 이렇게 혼잣말을 하자 겨드랑으로
서늘한 바람이 지나갔다.
나는 오전까지만 해도 서울의 그 만원인 틈새기에 끼여 있던 몸이
었다.  그러나 그 복잡하고 수선스럽던 일상이 까마득하게 느껴지는
것은 왠일인까.  내가 놓여난 것일까.  아니면 그들이 나를 소외시킨
것일까.
내 생의 절반 정도를 나는 서울에서 살았다.  그 혼탁과 다난과 어
울려서 파도 앞의 모래알처럼 굴러다녔다.  늘 가면을 느꼈고 내가 살
고자 한 삶이 아닌 타인의 삶을 사는 듯한 착각을 느껴오던 터였다.
그러나 나는 오늘 비로소 도시의 군중 속에 휩쓸려 다니는 '내'가
아니라 내가 '남'을 휩쓸리게 하는 군중의 일원이었음을 깨달았다.
입으로는 절대 고독에 의한 절대 자아를 운위하면서도 정작 자신은
군중 속에 묻혀 있어야 안정되고, 자신을 포기함으로 오히려 평화를
느끼는 삶이었지 않는가.
이번 여행길만 해도 그렇다.  '혼자 훌쩍 떠나가자'고 마음 먹었으면
서도 얼마나 일행을 희구했는가.  서울역에서도 친구를 구하려 했고
찾아온 곳도 결국 동창생의 근무지였지 않는가.
진실로 홀로 된 이 시간은 나의 의지에 의한 것이 아니라 신의 배
려에 의한 것이다.  나는 갑자기 신의 축복을 느꼈다.
나는 여인숙을 나와서 해질녘의 면소재지를 돌았다.  불던 바람은
나뭇가지 맨 위에서 놀고 있던 막내까지도 불러 들였다.  들녘에서 돌
아오는 소 울음 소리가 한가롭고 놀러 나간 아이를 찾는 어떤 어머니
의 목소리가 골목을 누빈다.
나는 오랜만에 방죽길을 걸었다.  노을이 번져 있는 냇물 속에 회개
하고 돌아온 탕아의 표정 같은 순한 산그리메가 깃들고 있다.
미루나무 밑에서 염소를 보고 있는 소년이 하모니카를 불었다.

해는 져서 어두운데
찾아오는 사람 없어
이일 저일을 생각하니
눈물만 흐른다

내가 이 노래를 마지막으로 불러 본 적이 언제였던가.  군복무 시
절, 비무장 지대의 그 황량한 갈대밭에 지던 노을 속에서였지 않는
가.
나는 하늘에 별이 돋는 것을 바라보면서 여인숙으로 돌아왔다.  여
인숙의 방은 그지없이 고즈넉하다.  낡은 벽지에 '우리는 사랑하므로
헤어진다.  마지막 밤'이라는 희미한 볼펜 낙서조차도 가슴에 와 닿는
다.
그릇을 씻는 설거지 소리가 그치자 노인네의 기침 소리가 건너오다
가 멎는다.
세수를 하고, 발을 닦고, 건너편 벽의 거울 속에 들어선 나의 얼굴
을 들여다본다.  생소하기도 한, 이 여인숙의 흙벽 같은 연민과 권태
와 우수가 버무려져 있는 저 표정......
먼 데의 개짖음 소리를 들으며 한 가지씩의 꺼풀을 벗어 이 적막한
시골의 밤에 묻으며 나는 기도한다.
-오늘 하루 저를 홀로 있게 해주신 은혜에 진정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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