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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연화의 문학-소설   창작소설
10여년만에 다시 시작하는 소설입니다.
습작이라서 서툴지만 시간나는대로 꾸준히 써볼 생각이랍니다
작성자 설연화
작성일 2018-02-05 (월) 13:52
홈페이지 http://sichenji.com
ㆍ추천: 0  ㆍ조회: 40      
IP: 121.xxx.85
장편소설 은파 4- 삭막한 가슴에서 피어나는 꽃 한송이
장편소설
은파
4. 삭막한 가슴에서 피어나는 꽃 한 송이

매화 가지에 꽃이 피기 시작하더니, 이내 한 잎, 두 잎 꽃잎이 날아와 초란의 옥상에 흰 눈처럼 쌓이기 시작했다. 숲길에서 연분홍 진달래가 봉오리를 머금고, 잔잔한 호수 물결을 바라보고 있다. 초란은 탱이를 안고 옥탑방 뒤편에서 호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탱이와 인연이 시작된 곳이기도 했다.
몸 하나 겨우 뉠 수 있는 작은 방에서 꼬박 6개월을 보내고, 옥탑방을 벗어나지 못했다. 어느 날 밤엔가 애처로운 고양이 울음소리가 뒤편에서 들렸다. 애처롭다 못해 간절한 울림. 초란은 창문을 열어 두리번거렸다. 구석에 있는 항아리 사이에 숨은 듯, 끼어 있는 듯 작은 몸을 웅크리고 앉아 자신을 바라보는 초란을 보자 잔뜩 움츠리며 더 뒤로 숨으려 했다. 초란은 주방을 뒤적거렸다. 성만이 이것저것 잡다한 재료들을 사다가 냉장고에 넣고 선반에 올려두는 것을 봤었다. 참치 캔 하나 정도는 있을 것 같았다. 참치 통조림을 찾은 초란은 그릇에 통째로 부은 후 항아리 앞에 내밀었다. 작은 아이는 귀를 뒤로 젖히고 잔뜩 긴장한 듯 더 깊은 곳으로 숨으려 할뿐, 생선 통조림에는 다가가지 않았다. 초란은 창문은 열어 둔 채 몸을 숨겼다. 얼마나 지났을까. 살며시 창문 넘어 고개를 내밀었을 때, 그릇은 깨끗이 비워졌고, 고양이는 여전히 잔뜩 움츠린 상태로 항아리 사이에서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다음 날 아침에도 고양이는 그 자리에 있었다. 혹시나 항아리 틈에 끼어 버린 것은 아닐까 하는 마음에 통조림 하나를 들고 뒤편으로 나갔다. 가까이 다가가보니 새끼 고양이였다. 조그만 고양이가 상처를 입은 것인지 연신 다리를 핥으며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나타난 그녀를 보고 일어섰지만, 다시 주저앉았다. 초란은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었다. 통조림에서 생선을 꺼내 아주 조금 손에 올려두니 경계를 하던 고양이는 한참 만에 초란의 손가락 냄새를 맡고, 조금은 익숙한 생선 냄새를 맡더니 배 고픈 듯 눈 깜짝 할 사이에 생선을 삼켰다. 초란은 고양이 가까이 다가갔다. 피하지 않았다. 손을 내밀어 고양이 머리를 쓰다듬었다.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구원을 기다리듯 초란의 손바닥에 머리를 비볐다. 초란은 조심히 고양이를 한 손으로 들어 올렸다.
앞다리에 상처가 있고, 뒷다리에는 다른 짐승에서 물린 것인지 피가 흐르고 있었다. 초란은 급하게 고양이를 안고 옥탑방으로 들어갔다. 사람에게 쓰는 소독약이 괜찮은지 아닌지 따질 겨를이 없었다. 우선 고양이 다리의 상처 치료가 급했다. 소독약으로 상처 부위를 닦아내고 지혈제를 바르고 붕대를 감았다. 사람 손이나 다리와 달라서 붕대를 감는 데 조금 어려움이 있었지만, 금세 방향에 맞춰 붕대를 감아주니 고양이는 기분이 좋은 것인지 절뚝이며 초란에게 다가와 자신의 몸을 비볐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다. 고양이의 상처가 아물어 갈 때쯤 초란은 고양이를 옥상에 내놓았다. 고양이는 움직이지 않고 초란을 바라보았다. 초란은 쪼그리고 앉아 고양이를 쓰다듬었다.
"엄마가 기다리는 곳으로 가. 엄마가 애타게 기다릴 거야. 우리 엄마처럼."
알아듣기라도 한 것일까. 슬금슬금 몇 번인가 뒤돌아보며 걷던 고양이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지금은 막아버린 숲으로 가는 계단을 타고 내려간 모양이다. 초란은 고양이가 사라졌을 그 방향을 바라보며 한참을 서 있었다. 그날 밤, 초란은 다시 고양이 소리를 들었다. 그녀가 방문을 열었을 때, 낮에 사라졌던 새끼 고양이가 초란의 창문 밖에서 말똥말똥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곤 단숨에 그녀가 바라보고 있는 창문으로 올라와 그녀의 무릎으로 뛰어내렸다. 그때부터 탱이와 초란의 동거는 시작되었다. 탱이는 자유로웠다. 집에 있는가 하면 어느새 사라지고, 며칠이 지나서 다시 들어오기도 했다.  

탱이는 초란의 무릎에서 벗어나 따뜻한 햇살이 머무는 옥상에 앉았다. 나른한 모양이다. 옆으로 눕더니 이내 눈을 감았다. 초란은 옥상 난간에 팔을 올리고 호수를 바라보았다. 소나무 사이사이에 옷을 벗었던 나무들이 잿빛에서 초록으로 바뀌더니 이내 작은 싹이 올라오는지 티눈처럼 자그만 것들이 사이에 들어왔다. 따뜻한 햇살과 선선한 바람에 초란은 나른했다. 오래간만에 커피를 마시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에 커피가 없는 것은 확실하다. 초란은 일어났다. 막아놓은 계단 입구를 열고 숲길로 내려갔다. 찰랑대는 호수 물결 소리가 들렸다. 겨우내 조용하기만 했던 새들이 바스락거리는 소리, 울음소리, 나뭇잎이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 어디선가 실려 오는 향긋한 봄 내음이 숲에 가득 배여있다. 일 년 동안 오갔던 길이지만, 처음 보는 풍경처럼 새롭게 느껴졌다.
겨우내 조용하기만 했던 호수가 사람들로 떠들썩했다. 봄이 오긴 온 모양이다. 수변로를 따라 한참 걷다 보면 작은 야외공연장이 있다. 저녁에 공연이 있는 모양이다. 똑같은 옷을 입은 무리가 여럿 보였다. 무대 설치 중이다. 스피커가 무대 위로 올라가고, 현수막에 군산 청소년 축제라는 글씨가 선명하게 보였다. 초란은 어느새 사람들 사이에 서 있었다. 그녀는 현수막에 있는 출연자 앞에 쓰인 학교 이름에 시선을 옮겼다. 자신도 모르게 모교를 찾고 있다. 초란은 길게 한숨을 내리 쉬며 발걸음을 옮겼다. 분주하게 움직이는 활기찬 사람들 사이에 자신만이 산송장처럼 초점 없는 눈동자로 멍하게 걷고 있다. 고개를 푹 숙이고, 주머니에 손을 넣고, 느릿한 발걸음으로 사람들 사이를 지나쳐 가고 있다. 주차장과 야외 공연장을 지나 공원 가장자리에 큰 도로를 따라 한참을 걸어야 한다. 그리고 롤러스케이트 장 옆에 있는 아파트 옆길로 들어서서 한참을 걷다 보면 카페가 있는 거리와 마주하게 된다. 초란은 한참 동안 더 걸어야 한다는 것이 싫었다. 귀찮았다.
'운전하고 갈 걸 그랬나?'
초란은 터벅터벅 걸었다. 마주쳐 오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관심 없다. 그저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이 남긴 갖가지 향기에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혼자 유추할 뿐이었다. 한참 걷던 초란은 카페 앞에 서 있었다. 성만이 먼저 그녀를 발견하고 카페 문을 열었다.
"누나! 그렇지 않아도 손님들 좀 한산해서 누나 만나러 갈까 하고 있었는데, 마침 잘 왔네? 그래, 가끔 이렇게 바람도 쐬고 좋지. 이제 날씨도 따뜻해지고 있으니까."
"나 커피 줘. 조금 달짝지근한 걸로."
"괜찮겠어요? 불면증 때문에 안 마시잖아요."
"커피 때문에 잠 못 자는 것이 아니라는 건 나도 알아."
성만은 분주하게 움직이더니 잠시 후 커피를 들고 초란이 앉은 자리 앞에 앉았다. 어느새 그는 손에 가방 하나를 들고 있었다. 가방을 초란 앞에 내려놓더니 씩 웃었다. 초란은 의아한 표정으로 성만을 바라보았다.
"이게 뭐야?"
"카메라!"
"왜? 성만 씨 여기 그만두려고? 취미로 사진 찍는다고 하지 않았나?"
"내 것 아니고 누나 거야."
"난 카메라 다룰 줄 몰라. 찍어 본 적도 없고…."
"누나, 이번에 또 문 잠그고 옥탑방에 자신을 스스로 가둬 버렸을 때, 많은 생각을 해봤는데…. 누나가 사실 조금씩 마음을 여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었어. 그래서 스스로 나올 수 있으리라 생각했거든. 그런데 다시 가둬 버리니까 좀 다른 방법이 필요할 것 같았거든. 내가 이 정도는 간섭해도 되지?"
초란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누나, 다음 주 월요일부터 여기 평생교육원 사진반에 한 번 가봐. 거기 강사가 내가 아는 형님인데, 사진작가고 전국 사진 공모전에서 대상도 받았어. 등록은 내가 이미 했고, 누나에 대해서는 특별히 부탁을 좀 해놨거든."
"아직은 사람들하고 마주치는 거 자신 없어. 나 자신도 내가 감당이 안 되는데, 사람들하고 어떻게 어울릴 수 있겠어."
"아니 누나 충분히 가능해. 누나 목소리 들을 수 있는 데까지 10개월 걸렸고, 지금은 이렇게 대화도 하잖아. 그럼 충분한 거야. 누나랑 대화하는 사람이 지금은 나밖에 없지만, 사람들하고 어울리고 또, 그 사람들하고 부딪히다 보면 누나가 어떤 목적을 찾을 수도 있잖아. 지금 누나한테 필요한 것은 목적인 것 같아. 살아야 하는 이유 말이야. 그냥 살아지는 것이 아니라, 숨만 쉬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교감하고 소통하고, 그러면서 누나가 보지 못하고 있는 희망. 삶의 의지를 찾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 같아. 지금처럼 계속 방에만 틀어박혀 있으면 점점 더 고립감에 외롭잖아."
"아직은 자신 없어. 나중에…."
"그럼, 다음 주 월요일 아침에 딱 한 번만이라도 강의 들어 봐. 그 다음에 누나가 싫다면 더는 권하지 않을게. 사람들하고 어울리는 것이 싫으면 카메라 조작법은 내가 가르쳐 줄 테니 혼자 찍어봐도 되고…. 그리고…."
성만은 종이가방 하나를 내밀었다. 초란은 종이 가방 안에 상자를 꺼내 들었다. 핸드폰이었다. 초란은 눈만 깜박이며 성만을 바라보았다. 성만은 씩 웃으며 핸드폰을 꺼냈다.
"아무리 연락 올 곳이 없다고 하지만, 핸드폰도 없는 사람이 어디 있어. 집 전화도 없고, 핸드폰도 없으니 누나한테 급하게 연락할 일 있으면 집으로 찾아가야 하고, 누나 없으면 찾아다녀야 하고, 내가 불편해서 그래."
"그냥 지금처럼 집으로 오면 되잖아."
"아니, 그냥 한마디 대답이면 되는 것도 직접 가야 하는 것 정말 힘들어. 누나도 알잖아. 나 게으른 것. 누나 핸드폰에 내 핸드폰번호랑, 가게번호랑, 그리고 평생교육원 사진반 강사 전화번호 저장해 뒀어. 아, 그리고 그 시장 통로 건물 1층 반찬가게 있잖아. 전 사장님이 혹시 누나가 나중에 뭔가 하고 싶어 할 지도 모르니까 가게 하나쯤은 비워두라고 해서 아직 가게 내버려 두고 있는데, 누가 거기를 북카페로 하고 싶다고 해서 내놓을까 하는데 어찌할까?"
"알아서 해!"
"누나, 그러다가 내가 관리하는 이것들 모두 들고 어디론가 사라져버리면 그땐 어떡하려고 그래? 그런 생각 한 번도 안 해봤어? 지금 이 상태라면 내가 마음만 먹으면 누나 재산 모두 합법적으로 빼돌릴 수도 있어. 정말 그렇게 될 수도 있다고."
"그렇다고 지금과 달라질 건 없잖아. 이 건물이 없어도, 재산이 없어도 모두 날려버려도 먹고 살 만큼, 아무것도 안 해도 먹고 살 수 있게 해 놨잖아. 바보 같은 엄마가. 그래서 더 살아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한다는 것은 몰랐었나 봐. 배고프면 어쩔 수 없이 삶으로 뛰어들어야 한다는 걸."
"누나가 이렇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 하셨을 거야. 난 누나를 이해할 수는 없어. 머리로는 이해가 돼. 누나가 왜 그러는 것인지 아니까. 그런데 가슴으로는 느끼지 못해. 난 사장님 같은 어머니가 계셨다면 어땠을까 생각해 본적이 많아. 난 어려서부터 어머니 약값을 벌어야 했고, 병원비를 벌어야 했으니까. 그뿐만이 아니라 동생들 학비까지 책임져야 했으니까. 내가 처음 사장님 만났을 때 이야기해 준 적 없지? 그때 엄마가 수술을 받아야 했어. 허약했던 엄마라서 한 가지 병이 나으면 또 다른 병이 시작되고, 그렇게 자잘하게 모든 식구를 지치게 했지. 그러다가 갑자기 의식을 잃고 쓰러지셨는데, 처음엔 영양실조라고 했어. 그러더니 조직검사 결과 위암 2기래. 항암치료보다 수술이 더 낫데. 병원비가 어디 있어. 생활비도 턱없이 부족해서 동생들 급식비, 그 몇 푼 안 되는 급식비까지 밀리는 판국이었어. 정말 딱 죽고 싶었어.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벗어날 길이 없는 가난이었지. 낮에 카페나 식당에서 일하는 것? 사치였어. 매일 공사현장에서 등짐을 지고, 하수구에 들어가서 작업하고, 그런 막노동하고 밤에는 대리운전하고, 새벽에 시장에 나가 짐꾼 노릇을 해도 엄마 병원비도 빠듯한데, 수술비가 또 필요했어. 그땐 정말 지쳐버렸어. 무엇을 해도 난 안된다는 생각에 주저앉아 버렸던 거야. 그때 사장님 만났어. 새벽에 시장에 짐을 나르는 내가 눈에 들어온 모양이야. 고등학생이었거든. 공사 현장 근처에서 식당일을 하던 사장님이 몇 번 현장에서 나를 봤었데. 그러다가 새벽에 거리에 주저앉아 있는 날 보더니 선뜻 제안하셨어. 당장 수술비를 줄 테니 어머니 수술시키고, 카페에서 일하라고, 일해서 갚으라고. 먹고 사는 것은 그다음이었어. 엄마 수술비는 있어야 했으니까. 무조건 고개를 끄덕였지. 하지만, 사장님은 수술비에 대해서는 돌아가실 때까지 언급하지 않으셨어. 내가 이야기를 꺼내면 이미 갚은 거라고만 말씀하셨어. 그렇게 사장님과 십여 년이야. 사람들은 내가 호주로 워킹홀리데이 다녀와서 사장님 만난 줄 알지만, 호주를 갈 수 있었던 것도 사장님 때문이었어. 더 넓은 세상에 가서 더 많은 것을 보고 경험하고, 그리고 돌아와서 사장님 일 해달라고 했어. 그동안 우리 엄마, 동생들은 모두 사장님이 보살펴 주셨고…. 사장님 그런 분이셨어. 그리고 다른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 정말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지. 그래서 난 변호사가 되고 싶다고 했어. 억울하게 누명을 써야 했고, 그래서 살인자가 되고, 그 억울함을 이기지 못해 일찍 세상을 떠난 아버지에 대한 그 억울함 때문이었을 거야. 내가 사법고시 합격할 때까지 사장님은 지원을 아끼지 않았어. 내 꿈마저도 사장님이 지켜주신 거야. 그래서 난 평생 사장님 대신 누나한테 보답해야 하고, 그래서 남아 있는 것뿐이야. 개인 변호사의 보수와 카페와 건물 관리자의 보수를 따로 챙겨주셨어. 그뿐만이 아니야, 내 동생들 꿈도 사장님께서 이룰 수 있도록 해주셨지. 그러면서 아들이라고, 작은아들이라고 하셨어. 나중에 혹시 사장님께 무슨 일이 생기면 누나의 친동생이 되어 달라고 하셨어. 그래서 난 누나를 떠날 수 없고, 누나를 정말 내 가족처럼 생각할 수밖에 없어. 누나가 귀찮아도 어쩔 수 없어."
초란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성만을 바라보았다. 진심 어린 눈빛에 다시 고개를 숙이고 조용히 읊조렸다.
"너마저도 엄마의 유품이구나…."
"맞아, 살아있는 유품이야. 누나를 위해 사장님이 준비한 유품. 난 사장님이 건물 팔 때 반대했어. 어차피 누나 결혼 생활의 끝이 보였거든. 누나는 모르겠지만, 사장님은 누나가 어떻게 생활하는지 사위가 뭘 하는지, 어떤 사람들이랑 어울리는지 다 알고 있었어. 사람을 고용했거든. 그래서 누나 결혼생활이 오래가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계셨어. 그러면서도 왜 그 많은 돈을 투자했는지 알아? 누나가 상처받는 것이 싫었던 거야. 누나 결혼할 때 그 자식이 누나 몰래 사장님 찾아 왔었어. 병원 지어달라고, 돈 많은 거 아니까 서울에 병원 건물 하나 자기 명의로 해 달라고. 그 자식이 누나 사랑해서 결혼 한 줄 알지? 아니 사장님 돈이었어. 하지만 사장님은 누나가 그 자식 사랑하니까. 어떻게든 상처 주지 않으려고 조건을 내거신 거야. 결혼하고 3년만 지나면 큰 병원은 아니더라도 개인 병원 하나 정도는 그 자식 명의로 해 주겠다고…. 3년 정도면 아이가 생길 테고, 그럼 누나는 남편보다는 아이에게서 더 큰 사랑을 찾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셨던 거지. 그런데 3년도 못 채웠지. 아이도 생기지 않았고. 미친 개자식, 내 눈 앞에 보이면 아주 뼈다귀 못 추리게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어."
"그만해! 엄마 이야기. 난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살았던 거니? 왜 살아 있는 거니? 엄마 이야기 못 듣겠어."
"아니, 들어. 더는 피하지 마. 왜 그렇게 사장님이 누나를 위해 사셨는지 정면으로 바라봐. 이제는 좀 봐. 누나가 이렇게 살아있는 것도 아니고, 죽은 것도 아닌 상태로 살기 바라셨을까? 죄책감으로 자포자기하고 살라고 모든 것을 준비하셨을까? 누나한테 복수하려고? 알잖아. 오직 누나의 행복만 바라셨다는 것. 엄마라고 인정하지 않아도 엄마였으니까. 누나가 창피해하고 엄마라고 인정하지 않으려고 애써도 엄마니까."
초란은 하염없이 떨어지는 눈물을 그대로 무릎에 버려두었다. 소리 없는 통곡이었다. 가슴 밑바닥에서 심장을 헤집고 나오는 고통이었다. 성만은 일어나 주방으로 향하고 초란은 한참을 그렇게 소리 없이 울었다. 얼마나 울었던 것일까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때 성만은 초란 앞에 따뜻한 보리차를 두고 다시 자리로 돌아갔다. 초란은 구석진 자리에서 거리에 오가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저마다 낯선 얼굴로 와서 사라지고, 누군가는 찡그리고, 누군가는 웃고, 누군가는 무표정한 얼굴로 창밖을 지나고 있었다. 저들의 가슴에도 누군가에게 찔린 상처가 있을 것이다. 저들의 가슴에도 차마 내뱉지 못한 수많은 사연이 숨죽이고 있을 것이다. 화사하게 차려입은 어느 여인의 옷자락 안에서, 밝고 싱그러운 웃음을 내뱉는 저 어린 소녀의 옷자락 안에서도 꺼내지 못한 아픔이 숨죽이고 있을 터였다.

초란은 몇 잔의 물을 마셨고, 몇 잔의 커피를 마셨다. 주체할 수 없는 졸음이 쏟아졌다. 울어서 지친 탓일까. 햇살의 따스함 때문에 나른한 것일까. 소파에 다리를 올려 무릎을 감싸 안고 창밖을 바라보며 그대로 잠이 들었다. 얼마나 잠들었던 것일까. 소란스러운 소리에 눈을 떴다. 해는 중천에 있었고, 창밖을 오가는 사람들은 여전히 분주했다. 카페에는 한 무리의 여자들이 수다를 떨며 들어왔다. 초란은 탁자 앞에 있는 핸드폰과 카메라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핸드폰 위에 그녀의 전화번호를 적은 메모지가 놓여있었다. 초란은 카메라 가방을 열었다. 카메라 설명서와 함께 성만의 메모로 보이는 빼곡한 설명이 같이 있었다. 설명서를 펼쳐 놓고 카메라를 꺼내 들었다. 여섯 명의 여자가 구석에 있는 넓은 자리에 앉아 큰소리로 웃으며 떠들었다.
"재민 엄마 다니는 시 창작반 선생, 잘생겼더라. 좋겠다. 목소리도 멋지다며?"
"그럼 뭐해. 서울서 제자 성폭행하고 협박하다 고소당하고, 도망치듯 군산 온 거라는데?"
"어머 진짜? 그럼 좀 무섭기도 하겠다. 얼굴값 하는 모양이네?"
"본인은 아니라고 하는데, 그 말을 어떻게 믿어? 인터넷 검색해 봤는데, 성폭행까지는 아니고 성추행이라는데, 엄청 시끄러운 사건이었더라고, 근데 그 결과는 없어. 그 사람 말대로 다른 사람의 소행이었다면 결과도 있을 거 아냐. 그런데 없어. 그러니 어떻게 믿어. 그래서 지난주부터 안 나갔어."
"생긴 건 믿을 게 못 되나 봐. 점잖게 생겼던데…."
"오히려 그런 사람들이 더 뻔뻔하고 추악한 법이야."
"폐강 되어야 수강료 돌려준다는데 폐강도 안 되고 있고, 아 진짜 짜증 나 죽겠어. 피 같은 돈 날렸잖아. 그거면 애들 학원 두 군데는 더 보내겠다."
"근데, 우리 사진반 강사는 사람이 좀 모자라나? 뭐가 그리 좋은 지 매일 싱글벙글, 사진작가로 유명하다는데 그렇게 보이지는 않아. 하는 짓도 좀 엉성하고."
"몇 살이나 됐어?"
"40대 초반이라는 거 같아. 꼴에 독신주의라네? 자기는 연애만 하고 산데. 결혼 같은 건 구속당하는 것 같아서 싫다나? 아무리 봐도 모테솔로 같은데"
"다 시끄러워 여편네들아. 난 꿈도 야무졌지. 평생교육원에서 기초 좀 닦고 열심히 해서 내년이나 내후년에는 등단이라는 것 좀 해보려고 했는데, 이게 뭐니? 다른데 알아봤는데 거기는 수강생이 없어서 폐강 했다하고…. 전주로 가야할까?"
"그냥 여기 다녀 봐. 뭐 정말 그렇게 큰 사고를 친 사람이었다면 학교에서 받아줬겠어? 뭐 오줌 지린 것처럼 찝찝하긴 하지만, 남자로 생각하지 말고, 그냥 자기가 배우고 싶은 거 가르쳐주는 로봇이라고 생각해!"
"그게 마음대로 되나? 그 강사 얼굴만 봐도 징그러운 생각부터 드는데…."
"그럼 월요일에 학교 안 가겠네? 나랑 전주 백화점 갈래? 저번에 봤던 가방 사러 가자."
"자기 그러다가 또 신랑한테 걸려서 쫓겨나지 말고 그냥 포기해라. 자기 신랑 한 달 월급이더라."
"시어머니 같은 소리 고만해라. 여자의 자존심이야. 진짜 그거 갖고 싶어서 적금 깼단 말이야"
"나, 그냥 학교 갈래. 저번처럼 자기랑 같이 싸잡혀서 된장녀 되기 싫다."
"그때는…."
초란은 조용히 여자들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그 사내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기다리는 용기일 것 같았다. 아직 끝나지 않은 전쟁 중인 그 사내의 숨죽인 울음소리가 얼핏 스쳤다. 초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성만이 겉옷을 들고 초란에게 다가왔다.
"집까지 데려다줄게요"
초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집에 돌아오는 짧은 시간. 성만의 시어머니 같은 잔소리는 끝나지 않았다. 몇 번인가 당부하고, 몇 번인가 협박하더니 씩 웃으며 돌아갔다. 초란은 한숨을 내리 쉬며 카메라 가방을 들고 마당으로 들어섰다. 마당 한쪽 햇살이 가득 들어오는 자리에 동네 여자 서너 명이 모여 수다를 떨다 초란을 발견하고 손짓했다.
"호박고구마 삶았는데, 같이 먹어"
"아니요. 생각 없어요."
"그러지 말고 이리 와."
아래층 여자가 초란의 손목을 끌어당겼다. 초란은 귀퉁이에 놓인 의자에 앉아 얼굴로 내리쬐는 햇볕에 눈 감고 하늘을 바라다보았다. 여자들 수다의 주제 또한 옆집 남자였다.
"그래서 어떡할 거야?"
"난 하숙집 할매 말 믿어 보려고."
"미장원아, 안 찝찝해? 사실 확인이 안 되잖아. 어떻게 믿어? 솔직히 그 정도 반반하게 생긴데다가 목소리 딱 깔고 여자들한테 뭔 짓인들 못 하겠어?"
"성희 엄마, 너무 그러지 마라. 그 집 아저씨랑 일도 같이 하는데…."
"그거랑 상관없잖아."
"그러다 성희 아빠한테 걸리면 이번에는 어찌 될라나?"
"내 입가지고 말도 못하냐? 미장원 너도 그래, 언제는 성추행인지 성폭행인지 알게 뭐냐 더니, 언제 또 고 씨한테 홀라당 넘어갔냐? 반반한 얼굴 보니까 왜 설레?"
"못하는 소리가 없다. 성희 엄마 너는 나오기 싫으면 나오지 마. 난 해 볼란다."
"공부가 아니라 연애해보고 싶지? 뭐 너도 혼자고 고 씨도 혼자니까 어떻게 해 볼 작정인가 본데, 야야 꿈 깨라. 어린 애들 취향 같은데, 너 같은 늙다리한테 관심이나 있겠냐?"
"아주 그 주둥아리 재봉틀질을 해야 니년이 정신 차리지? 보자 보자 하니 아주 절로 터진 입이라고 별 거지 같은 소리 다 하지? 내가 초란 씨 앞이라 차마 말을 못하고 가긴 한다만, 너 그러는 거 아니다. 세 치 혀 조심해 이년아! 그러다 니 세 치 혀에 니년 목구멍 막혀 죽어!"
아래층 여자는 미장원 여자에게 금방이라도 달려들 기세였다. 언제나 그랬다. 그들은 내일이면 또 언제 그랬냐는 듯 둘이 앉아 수다를 떨 것이다. 아래층 여자가 초란을 바라보았다.
“초란 씨한테 접근한 것도 좀 생각해 봐야 해. 밑바닥까지 굴러떨어진 사람이 보이는 것이 있겠어? 옆집으로 이사 온 것이 우연이라고 생각해? 자기 재산 노리는 거야. 내가 장담한다. 좀 친해지면, 이것 해 달라 저것 해 달라 아주 못 뜯어 먹어서 안달일걸?”
“아이고, 미친년, 내가 상종을 말아야지. 다시는 얼굴 보지 말자.”
초란은 조용히 일어나 계단을 올랐다. 잔뜩 화가 난 미장원 여자가 마당을 빠져나가더니 힘차게 닫는 대문 소리에 초란은 무심결에 뒤를 돌았다. 사내가 있었다. 옆집 대문 벽 쪽에 기대어 여자들의 말다툼을 조용히 듣고 있었던 것 같다. 초란은 사내의 표정을 보고 싶었지만, 고개 떨구고 계단을 오르기에 표정을 보지 못했다. 그의 한숨 소리가 들렸다. 사내가 고개를 들어 초란 쪽을 돌아보았다. 담벼락과 고샅길을 사이에 두고 초란과 사내는 나란히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초란은 엉겁결에 묵례하고 계단을 올라섰다. 사내는 한동안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는 모양이다. 발걸음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초란은 옥탑방으로 몸을 숨겼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손도 바르르 떨리는 것 같다. 아직 대화 한마디 나눠보지 않은 사내다. 그런데도 초란은 떨고 있다. 두려움은 아니다. 기분 좋은 두근거림이었다. 얼굴에 뜨거움이 올라왔다. 초란은 가방을 내팽개치듯 내려놓고 냉장고를 열어 생수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언제부터 자리하고 있었는지 맥주 캔 몇 개가 나란히 줄지어 세워져 있었다.

승혁은 계단에 멍하니 서 있었다. 그녀도 있었다. 얼굴에 화끈거림이 올라오는 것 같았다. 그가 평생교육원 사무실에 몇 가지 서류를 제출하고 카페에서 노교수를 만날 때, 그녀는 카페 구석진 자리에서 웅크리고 있었다. 우는 것인지, 잠든 것인지 알 수 없지만, 가냘픈 그녀의 어깨가 가끔 들썩였다. 언제나처럼 그녀가 걸어올 것으로 생각하고 수변로를 따라 천천히 걸었다. 혹시라도 마주칠 수 있을까 싶어 정자에서 한참 앉아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 그녀와 짧은 이야기라도 나눌 수 있을까 했던 기대를 포기하고 집으로 들어서기 위해 고샅길을 걸을 때, 안쪽에서 여자들 싸우는 소리가 들렸다. 그의 이야기였기에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그녀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대문에 기대어 서 있었다.
지난 목요일 수업 때, 남자 수강생 일부도 나오지 않았다. 출석은 겨우 6명. 모두 남자였다. 사무실로 항의 전화가 쇄도하고 수강료를 되돌려 달라는 전화가 빗발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가 사무실에 갔을 때, 그 자리에 있던 강사 몇 명의 시선은 그날 교무실에서 마주한 선생들의 눈빛과 같았다. 승혁은 고개 숙이지 않았다. 당당해지기 위해 아무 일도 없다는 듯 고개를 들고, 조금만 더 시간을 달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시간이 지나면 오해라는 것을 사람들이 알 것이라는 말도 했다. 사무실을 나오는 뒤통수에 누군가 소리쳤다.
"다른 사람들까지 싸잡아서 욕먹게 하지 말고 그만 폐강하지. 이런 것이 민폐라는 걸 모르나?"
"도대체 저런 사람까지 강사로 받아 주는 이유가 뭡니까? 아무나 강의실 내줘도 됩니까?"
승혁은 주먹을 꽉 쥐고 입술을 깨물었다. 어떤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그는 버텨야만 한다. 여기에서 포기하면 삶 자체를 포기하게 된다. 시 창작반을 폐강한다 해도 큰 변화는 없다. 돈이 될만한 일은 뭐든 하고 있다. 몸이 부서지는 통증이 와도 그는 아침에 눈을 뜨고 밥을 먹고 일을 해야 한다. 하지만, 강사 자리는 그의 마지막 자존심이자 삶의 이유다. 교사를 천직으로 알고 살았던 그가 강사 자리마저도 없다면 저 밑바닥으로 떨어져 다시는 그 자리에 설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었다. 그들이 만들어 놓은 함정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것 같았다. 아직 그도 처음부터 시작할 용기는 없다. 초란에게 건넨 그 메모는 그녀에게 하는 말이 아니었다. 그가 자신에게 하는 말. 그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 같은 고통을 가진 사람들만이 아는 아픔이기에, 넘어야 할 산이기에.
한동안 연락이 없던 이혼한 아내가 전화했다.
"이혼했어도, 지민이 당신 딸인 건 변함없잖아? 1년 동안 보내지 않은 양육비는 보내라고 하지 않을게, 다음 달부터 양육비 보내야겠어. 여기서 내가 할 수 있는 일도 별로 없고, 오빠네 얹혀사는 것도 미안한데 생활비에 양육비까지 달라고는 할 수 없잖아? 1년 정도 지났으면 그 일도 잠잠해졌을 테고, 그러니 다음 달부터 보내. 지민이는 한국 들어가기 싫고, 당신 만나는 것도 싫다고 하니까. 그렇게 알고 있으면 될 것 같아."
잊고 있었다. 떠나 버렸기에 더는 그와 상관없는 사람들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아버지로서 아직 지민을 부양해야 할 의무를 지니고 있었다. 앞으로 5년 동안 그들에게 양육비를 지급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아니 꼭 의무가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지민이도 아버지의 진실을 믿어주고 이해해 줄 수 있는 날이 있으리라는 희망이 생겼다. 돈도 중요했지만, 딸에게 당당한 아버지로 남기 위해서는 사회적 위치도 중요했다. 어떤 수모를 겪더라도 강제 폐강이 되지 않는 한 스스로 폐강시킬 수는 없었다.
견딜 만 했다. 모르는 사람들의 경멸과 무시는 마음의 문을 닫아걸면 그뿐이다. 시간이 지나면 잊힐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녀 앞에서는 부끄러웠다. 아직 대화 한 번 제대로 해 본 적 없는 그녀였지만, 알 수 없는 이끌림이 있었다.
완전한 우연이 있을까. 우연이 여러 번 반복되면 필연이라고 했던가. 그러나 그녀와 승혁이 우연히 만난 적은 없다. 운명처럼 만들어진 필연에서 맺어진 우연의 각본. 아주 작은 선택이 삶의 지표를 결정하고, 그 결정된 지표의 교차점에서 만날 수밖에 없는 필연을 만들게 된다. 그리고 다시 작고 큰 선택 때문에 가는 길의 방향이 같거나, 전혀 달라지는 인생 지표들. 그 선택의 결과물 지표 안에서 승혁과 그녀의 교차점이 바로 지금이다.
승혁은 방으로 돌아와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감정의 사치다. 지금 초라한 몰골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그녀에게 향하는 이끌림이 동병상련이든 호감이든 지금 그의 처지에 감당키 어려운 또 하나의 감정이 끼어들었다. 방 안이 답답했다. 아직 어두워지기 전이지만,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처럼 자그만 방이 답답했다. 승혁은 넥타이를 풀어 제치고 무작정 밖으로 나갔다. 어딘가에 올라 소리라도 질러보고 싶다. 힘없이 무너진 자신의 삶 앞에서 스스로 당당해지려 노력했지만, 낯선 여인 앞에서 또 무너지는 자신이 한없이 초라했다. 술이라도 진탕 마셨으면 좋겠지만, 일요일 새벽은 박 씨를 따라 나가야 하지 않은가. 답답해서 미쳐버릴 것 같았다. 무작정 큰 도로로 나가 택시를 탔다.
"마음껏 소리라도 지를 수 있는 곳 없나요? 가까운 데 산이라도…."
기사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한참을 달렸다. 다닥다닥 붙어 있는 건물들 사이를 한참 동안 달리더니 이내 작은 좁은 길로 접어들었다. 그리고 산비탈 어느 절 앞에서 가는 길을 멈췄다. 승혁은 택시비를 계산하고 무작정 절 옆에 있는 계단을 올랐다. 월명산 흥천사. 건물만 덩그러니 놓여있는 절이었다. 승혁은 힘겹게 계단을 올랐다. 비릿한 바다 내음이 폐 깊숙이 빨려 들어왔다. 가까운 곳에 바다가 있는 모양이다. 사람들이 많이 지나는 길이 아닌 조그만 숲길을 택했다. 겉에서 보는 것과 달리 안에는 넓은 공원이 있었고, 수시 탑이 세워져 있었다. 승혁은 깁게 심호흡을 하고 바다를 향해 섰다. 건너 편 장항이 한 눈에 들어오고 먼바다에서 들어오는 배 한척이 내항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섬뜩하리만큼 가슴이 뚫렸다. 소리 지르지 않아도 이미 가슴은 바닷바람에 젖어 울고 있었다. 수시 탑 아래 주저앉았다. 갈매기 한 마리가 그의 머리 위를 날더니 이내 다시 바다를 향해 돌진하듯 날았다. 승혁은 벌떡 일어나 입구로 내려갔다. 작은 가게를 언뜻 본 것 같았다. 입구로 내려가니 스치듯 봤던 가게가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탁자가 서너 개 놓여있는 자그만 공간에 한쪽에는 평상처럼 넓은 자리가 있었고, 그 안쪽은 살림방인 듯한 방문이 있었다. 그 앞에서 노인 서너 명이 난로 옆에 두고 앉아 김치에 막걸리를 마시며 화투장을 만지고 있었다. 문 소리에 자그만 주방문을 열고 노파가 나왔다. 키가 작고 허리가 굽어 오래된 그 자그만 가게와 딱 맞아 떨어지게 어울린다는 생각이 드는 노파였다. 승혁은 소주 한 병을 꺼내 계산을 하고 나오다 다시 뒤돌아보았다.
"혹시 조용히 생각할만한 조용한 곳이 이 근처에 있을까요?"
"이동네 사람이 아닌 갑구만? 여그서 저 큰길을 따라 쭉 한참 올라가믄 막걸리 집이 하나 있으거싱만 그 가게를 오른쪽에 두고 옆길로 쬐감 더 가믄 군산 시내가 한눈에 보이는 곳이 있제. 근디 무서운 생각허고 가는 것은 아니제? 거그가 쪼감 위험허거든. 아래가 낭떨어지라서…."
"감사합니다."
승혁은 노파가 알려준 길을 따라 걸었다. 답답함의 원인을 알 수 없었다. 이미 각오한 일이 아니었던가. 그가 만나는 그 어떤 이에게서도 그 사건을 감출 수도 변명할 수도 없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그 여자들 싸움 한가운데 있었다는 사실만으로 가슴에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참을 수 없다. 더 참을 수 없는 것은 되지도 않는 어처구니없는 분노를 느낀 자신이었다.
"이건 뭐 하자는 건데? 니 처지에, 구렁텅이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지금, 뭘 할 수 있다고. 왜 화가 나는데? 미친놈, 아직 정신 못 차렸어. 아직 멀었어. 미친놈이다. 넌 미친놈이야. 미친 놈…."
승혁은 들고 온 소주를 벌컥벌컥 마셨다. 참을 수 없는 분노였다. 아니 부끄러움이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왜 그토록 자신이 부끄러운 것인지, 왜 얼굴이 화끈거리고 말할 수 없는 답답함이 가슴을 눌렀는지 알 수 없었다. 벤치에 앉았다. 작다고 생각했던 군산 시내가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높고 낮은 빌딩들 사이에 낮은 산, 먼 곳에 끝없이 펼쳐진 들판. 이제 푸릇푸릇 생기가 도는 들판이었다. 승혁은 일어났다. 숨을 깊게 들어 마시고 가슴 저 밑바닥에서 끓어오르는 답답함을 소리 내어 뱉었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나보고 뭘 어쩌라고! 나도 살고 싶을 뿐이야! 살아야 한다고…. 어찌 되었든."
승혁은 풀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연신 술을 벌컥벌컥 마셔대고 그대로 벤치에 누웠다. 싸늘한 바람이 온몸을 감싸고 뼛속까지 파고드는 것 같았다. 승혁의 눈에서 이슬방울 하나가 도르륵 볼을 타고 내려와 벤치에 떨어졌다. 멀리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누워 있는 그의 몸 위에 따뜻한 담요가 냉기를 막았다. 멀어지는 발걸음 소리에 승혁이 고개를 들었다. 백발의 꼬부랑 노인이 그의 시야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승혁은 한동안 그렇게 누워 흐릿한 눈으로 군산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났다. 승혁은 자리에서 일어나 담요를 들고 막걸리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백발의 노인이 평상에 앉아 승혁을 애처로운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담요 감사했습니다."
"가끔 있는 일 이유. 가슴 답답한 사람들이 가장 잘 찾는 곳이기도 하지.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힘내시게! 바다에서 거친 풍랑에 배가 뒤집힐 것 같아도, 그 풍랑이 잠잠해지면 만선을 기대하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라네. 지금 눈보라 친다고 세상이 얼어붙지는 않아. 시간이 지나면 눈보라 치던 이 산막에도 꽃이 피거든."
"좋은 말씀 새겨듣겠습니다. 가끔 답답할 때 한 번씩 와도 괜찮지요?"
"너무 자주 오지는 말게."
승혁은 묵례를 하고 발걸음을 옮겼다. 집 대문 앞에 서 있었지만,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무심결에 고샅길을 걸어 정자를 향해 걸었다. 숲길이 시작되는 지점에서 승혁은 걸음을 멈췄다. 그녀가 정자에 기대어 호수를 바라 보고 있었다. 승혁은 헛기침 한 번 하고 정자를 향해 걷자 그녀가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그냥 호숫가로 갈 겁니다. 안심하세요."
그녀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정자를 지나치던 승혁이 그녀를 마주보고 섰다. 그녀도 승혁을 바라보고 있었다. 승혁은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표정은 미동도 없었다.
"무섭지 않으세요? 요즘 이 동네에서 떠도는 소문은 들으셨을 텐데."
"사실이 아니잖아요."
"알고…. 계셨나요?"
초란은 말없이 맥주를 내밀었다. 이미 몇 개의 맥주 캔이 그녀 옆에서 나뒹굴고 있었다. 승혁도 맥주를 받아들고 그녀 옆에 앉았다. 둘은 말없이 맥주만 꼴짝거렸다. 어색한 침묵에 초란은 고개를 들어 호수를 바라보았다.
"저 호수 이름이 왜 은파인 줄 아세요?"
"네?"
"달빛이 물결에 닿아 흔들리는 모습이 정말 아름다운 곳 중의 하나여서 은파라는 이름이 지어졌데요. 은빛 물결. 은파. 햇살이 호수에서 출렁이는 모습보다 어둡고 잔잔한 밤에 오로지 그 하나만 보이는 은빛 물결. 그 빛이 참 아름다워요."
"어두운 밤에 오직 하나만 보이는 빛. 초란 씨와 내가 찾고 있는 빛이겠죠?"
"아마도…."
"그 빛은 찾으셨나요? "
"아직…. 그쪽은요?"
"저도 아직입니다. 빛을 찾으려 할수록 더 깊은 어둠 속으로 빠지는 것 같네요. 아, 그리고 제 이름은 고승혁입니다. 소개가 늦었네요."
"저는…."
"하초란 씨. 아래층 사시는 형님과 같이 일하다가 보니 초란 씨 이름은 자연스럽게 알게 됐네요."
"그 일 힘드실 텐데. 선생님 하시던 분이 막노동 해 보셨을 리 없고…."
"해야죠. 어찌 되었든 살아 봐야 하니까."
"며칠 전에 좋은 말씀 감사했어요. 미움받을 용기, 새로 시작할 용기. 찾아보려고요."
"초란 씨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아니라, 저에게 하는 말이었습니다. 전 아직 기다리는 용기도 없어서 이렇듯 방황하고 있네요. 초란 씨, 우리 친구 할래요?"
"…."
"당황스럽게 했다면 죄송합니다. 이곳에 내려와 처음으로 대화다운 대화를 하다 보니, 제가 좀 들뜬 모양입니다. 그냥 서로 버팀목처럼 위로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
"밤이 늦어서 전 그만…."
"네, 오늘 대화 감사했습니다. 즐거웠고요."
초란은 일어나 묵례를 하고 정자 뒤편으로 사라졌다. 승혁은 벌떡 일어났다. 고샅길이 아니라 숲속으로 들어가는 초란에게 뭐라 말을 건네려 할 때, 그녀는 옥탑방 뒤쪽에서 나타났다. 승혁은 그때야 자리에 앉았다.
'뒤에도 계단이 있었네?'
승혁은 한동안 그렇게 자리에 앉아 있었다. 반달이 호수 위에 덩그러니 떠 있고, 그 아래 은빛 물결이 출렁이고 있었다. 시원한 봄바람이 승혁의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작은 씨앗 하나가 승혁의 심장에 자리를 잡은 모양이다. 연신 방망이질하고 있다. 승혁은 월명산 노익장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오는 것 같았다.
"눈보라 치던 이 산막에도 꽃이 피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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