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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연화의 문학-소설   창작소설
10여년만에 다시 시작하는 소설입니다.
습작이라서 서툴지만 시간나는대로 꾸준히 써볼 생각이랍니다
작성자 설연화
작성일 2018-01-15 (월) 16:06
홈페이지 http://sichenji.com
ㆍ추천: 0  ㆍ조회: 34      
IP: 121.xxx.85
장편소설 은파2-시린 겨울 바람에도 꽃은 핀다
장편소설
은파

2. 시린 겨울바람에도 꽃은 핀다.

승혁은 그녀가 계단을 올라가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의미 있는 시선은 아니었다. 그저 움직이는 물체를 따라가는 무의식중의 시선. 그녀가 옥상에서도 모습을 감추자 승혁은 정자에 엉덩이를 기대어 섰다. 고요한 흔들림이다. 저 밑바닥 저승의 불지옥이 지금 사내의 심장에서 들끓고 있다. 이젠 세상을 향해 화를 낼 기운도 없다. 아니라고 항변할 기운도 없다. 이제는 살아야 한다. 비난의 화살이 심장에 꽂힌다고 해서 심장이 멈추거나 하는 일은 없다. 지금 현 사회에서 그는 죽었다. 주변에 아는 사람들은 모두 그를 향해 손가락질하고, 그 손가락질을 견디지 못했던 아내는 떠났다. 막 중학생이 되어 가장 민감한 나이였던 딸아이의 그 싸늘한 시선을 그는 잊을 수 없었다.
"사람들은 아빠의 진실은 궁금해하지 않아. 아빠가 딸 같은 여학생을 성추행했다는 그것만 기억할 뿐이야. 난 비도덕적이고 짐승 같은 아빠의 딸이 되어버렸어. 아무리 아니라고 외쳐도 사람들은 믿지 않아!. 아니 나도 아빠의 진실이 무엇인지 모르겠어. 더러워. 그냥 더럽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아. 아빠가 세상에서 없어졌으면 좋겠어. 아니면 내가 세상에서 없어지든가."
승혁은 가슴을 움켜쥐었다. 사람들의 손가락질은 견딜 수 있었다. 그러나 딸아이의 마지막 말은 그의 심장에 박혀 매일 난도질하고 있다. 어디를 가든 꼬리표처럼 소문이 따라다닌다. 딸 지민은 한동안 우울증과 대인기피증으로 정신과 상담을 받았지만, 세상 밖으로 나오는 것은 쉽지 않았다. 아내는 결국 그녀의 오빠가 있는 필리핀으로 이민 가버렸다. 그들이 떠난 지 1년이 넘었다. 그 어떤 소식도 듣지 못했다. 연락조차 하지 않았고, 소식조차 전하지 않았다.

어느 날이었던가. 화사하게 피었던 꽃들이 시들해지고, 태양이 점점 뜨거워지던 유월의 찬란한 여름. 특별활동으로 문예 창작반이었던 여학생이 교실에서 울고 있었다. 교내 백일장은 물론이고, 전국 백일장을 휩쓸어 기존 문단 문인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는 여학생이었다. 승혁이 교실로 들어서자 아무 일도 없는 듯 눈물을 훔쳤지만, 그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수혜야, 무슨 일이야? 왜 울어?"
"아…. 아무 일도 아니에요. 그냥…."
"무슨 일 있었구나? 선생님한테는 말 못 할 일이야? 남자친구랑 싸웠어?"
그때였다. 수혜는 신음처럼 소리를 죽이며 통곡하고 있었다. 승혁은 수혜에게 다가가 어깨를 토닥였다. 그가 해 줄 수 있는 위로는 어깨를 토닥이는 것밖에 없었다. 승혁의 손길을 느낀 수혜는 승혁의 허리춤을 부여안고 꺼이꺼이 울었다.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울 수 있다면 소리 내서 울어. 목이 쉬도록 울어도 돼. 그러고 나면 조금은 나아질 거야."
수혜는 서 있는 승혁의 허리춤을 부여잡고 그렇게 한참을 울었다. 그녀의 울음소리가 잦아들자 승혁은 살포시 수혜의 어깨를 감싸고 토닥거렸다. 멈추지 않는 수혜의 울음소리는 하늘을 붉게 물들이고, 노을은 수혜의 눈물방울에서도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승혁은 그녀의 반대편에 앉았다. 이제 이야기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녀의 손을 잡고 토닥거리자 그녀는 그때야 고개를 들어 승혁을 바라보았다.
"이제 무슨 일인지 말할 수 있지?"
"용돈이 필요했어요. 그래서 교장 선생님께서 퇴임하기 전에 시집이라도 한 권 내고 싶으시다면서 도와달라고 하셨어요. 4월에 교장 선생님께서 20만 원을 주셨고, 5월에 20만 원, 그리고 오늘 최종 마무리하는 날이라 교장실에 갔는데…. 문을 잠그고 창문 커튼을 닫으시더니…. 그리고 마지막에 저의 벗은 모습을 사진으로 찍으셨어요. 누군가에게 말하면 인터넷에 뿌리겠다고……. 죽고 싶어요. 내 몸에 더러운 것들이 기어 다니는 것 같아요. 바퀴벌레 같은 것들이, 끈끈한 점액이 내 온몸에 스멀스멀 기어 올라오는 것 같아요."
그녀는 다시 울음을 터트렸다. 승혁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해 년마다 버릇처럼 여학생을 불러 성폭행을 한다는 것은 선생들 사이에 공공연히 알려진 일이었다. 그러나 누구 하나 나설 수 없었다. 재단에서 운영하는 사립고등학교. 이사장 라인이었던 교장의 횡포는 폭력적이고 안하무인이었다. 교장에서 맞서다가 몇몇 교사가 그럴싸한 이유로 그만두고, 해임 당했다. 그 교장에 맞설 힘이 승혁에게는 없었다. 분노만 응어리로 남아 있을 뿐.

다음 날, 출근하던 승혁은 날카로운 시선을 느꼈다. 무엇인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출근할 때는 멀리서도 뛰어와 인사를 하던 학생들이 한 발자국 떨어져 수군거렸다. 그가 교문을 들어설 때였다. 여기저기서 달걀이 그를 향해 돌진했다. 교문에 모인 학생들이 던지는 달걀이었다. 승혁은 그들이 들고 있는 팻말에 시선을 돌렸다.
"제자 성추행 교사. 추악한 짐승. 떠나라. 성폭력범에게 무엇을 배워야하는가. 잔인한 영혼 살인자."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승혁은 학생들의 달걀 세례와 언어폭력을 뚫고 교무실로 향했다. 교무실 문을 열었을 때, 동료 교사들의 싸늘한 눈빛은 일 년도 훨씬 넘은 지금에도 잊을 수가 없다. 더러운 쓰레기를 보는 듯, 냄새 나는 똥을 보는 듯, 징그러운 뱀이나 파충류가 몸에 닿았을 때나 지을 수 있는 표정들이 일제히 그를 향했다. 짧은 펌 머리에 독기가 어린 작은 눈을 돋보기안경에 감추고 얇은 입술에 붉은 보랏빛 립스틱을 칠한 여교감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프린트물을 승혁의 가슴에 던졌다.
"고선생 그렇게 안 봤는데, 몰상식하고 비도덕적이고 아주 파렴치한이었군요."
승혁은 발아래 떨어진 종이에 시선이 머물렀다. 여학생의 얼굴은 모자이크처리 되었지만, 그의 얼굴은 그대로 드러난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울고 있는 수혜를 달래느라 그녀의 어깨를 감싸고 있는 모습이었다. 승혁은 어처구니없는 마음에 피식 웃었다.
"이건 학생이 울고 있기에 달래주고 있었던 것입니다. 성추행이라니요. 말도 안 되는 억측입니다!"
"여학생이에요! 달래주고 있었다고요? 누가 봐도 억지로 끌어안은 모습이지요. 아니 진실이 무엇이든 이미 이 사진은 학교 홈페이지 게시판에 올라와 있고, 학생들이 모두 고 선생 수업을 거부하고 있어요. 일이 더 커지기 전에 당분간 좀 쉬시는 것이 좋겠어요. 교장 선생님 말씀입니다. 휴직으로 처리할 테니 당분간 학교에 나오지 마세요."
"말도 안 됩니다. 우는 학생 달래는 것이 성추행이라니요."
승혁은 자리를 박차고 교무실 문을 열었다. 수많은 학생이 교무실 주변에 모여 야유를 보냈다. 그 중에 수혜를 찾았지만, 수혜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교장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수혜와 교장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승혁을 본 수혜는 자리에서 일어나 교장실에서 나가려 했다. 승혁은 수혜의 팔목을 잡았다.
"여기서 진실을 말해!"
"무엇을 말씀하라는 것인지. 교장 선생님께 말씀 다 드렸어요. 어제 선생님께서 제 몸 더듬었던 것까지."
"무슨 소리야? 수혜야!"
"저는 할 말 없어요."
수혜는 교장실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 순간 승혁은 밖에 학생들이 모여 있다는 것이 생각나 수혜를 잡으려 했지만, 수혜는 이미 교장실 문을 열었다. 우르르 몰려있던 학생들은 모두 교실로 돌아간 모양이다. 복도는 텅 비어 있었고, 몇몇 선생들이 힐끗 교장실을 흘겨보며 지나갔다.
"더 끌어봐야 고 선생만 다쳐요. 조용히 넘어갑시다. 필요하다면 내가 다른 사립고등학교 알아봐 줄 수도 있어요."
"아니지요. 교장 선생님의 치부를 제가 끌어안고 갈 수 없잖습니까!"
"이 봐요. 고 선생.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것입니까? 내 치부라니요! 고 선생이 한 짓을 모두 알고 있는데, 이제 보니 아주 낯짝도 두껍군요."
"다 들었습니다. 교장 선생께서 했던 그 더러운 짓들 말입니다."
"증거가 있습니까? 그런 황당한 소리를 믿어 줄 만한 사람이 있을까요? 제자의 몸을 더듬고 성추행한 교사의 말을 누가 믿어 준답니까? 증거는 고 선생이 제자를 성추행한 사진밖에 없는데! 학생들이 언제든지 드나들 수 있는 교실에서 쯧쯧…. 요즘 부부사이에 문제 있습니까?"
안하무인 교장과 더는 대화가 이어지지 않았다. 뻔뻔하다 못해 자신의 행위에 대한 자각이 없는 파렴치한이었다. 승혁은 오명을 안고 학교를 떠날 수는 없었다. 그의 수업시간이 되어 교실에 들어갔을 때, 교실은 텅 비어 있었다. 칠판에 승혁을 거부하는 욕설만 가득했다. 승혁은 수혜와 이야기를 해 보고 싶었지만, 수혜를 만날 방법이 없었다. 의도적으로 피하고 있다. 아니 몇 번 마주쳤을 때 말을 건넸지만, 그녀 주변에 있는 아이들의 거센 항의에 더 이상 가까이 갈 수 없었다. 그녀의 집까지 찾아갔지만, 오히려 그녀의 부모에게 물세례를 받고 돌아왔을 뿐이다.
그렇게 외로운 싸움이 며칠 지속하는 동안, 수혜는 성추행으로 승혁을 고소했다. 수혜의 자발적인 행동이 아니라는 것을 승혁은 알고 있었다. 교장의 협박에 의한 행동이라는 것을. 고소가 접수되고, 언론이 나섰다.
"서울 모 고등학교 국어교사, 파렴치한 성추행."
사건이 확대되자 재단 이사회는 승혁을 파직했고, 경찰은 이미 그의 범행을 기정사실로 해 놓은 상태에서 수사가 진행되었다. 길고 긴 싸움이 시작되었다.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싸움은 계속되고, 주변에 알던 사람들은 모두 그에게서 등을 돌렸다. 딸 지민이 언론의 가장 큰 피해자였다. 친구들에게 따돌림당하고, 학부모들은 지민의 전학을 요구하고 나섰다. 어느 날은 지민이 피투성이가 되어 들어오기도 했다. 아내는 싸늘했고, 지민은 방문을 걸어 잠갔다. 끝내 지민은 자살을 시도했다. 다행히 일찍 발견되어 생명은 구할 수 있었지만, 지민의 영혼은 이미 죽었다. 세상을 향한 문을 닫아버렸다.

재판이 끝나 갈 무렵이었다. 승소할 확률은 없었다. 변호사도 교장의 핸드폰까지 확인했지만, 어디에서도 수혜가 말했다던 사진은 발견되지 않았다며 승소를 포기한 상태였다. 승혁이 오명을 벗을 길이 막막할 때, 수혜는 고소를 취하했다. 그리고 교장을 고소했다. 교장이 혹시 사진이 문제 될까 싶어 핸드폰과 컴퓨터에 저장된 사진을 모두 지웠다는 것을 수혜가 알았던 것이다. 그날 교장실에서 있었던 일이 고스란히 수혜의 핸드폰에 녹음되어 있었다. 동영상 촬영이었지만, 옷에 가려져 있어서 목소리만 녹음되었다. 교장이 수혜를 협박했던 내용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을 뿐만 아니라, 승혁이 교장의 성폭행을 알고 있으니, 승혁을 고소하라는 지시와 협박 등이 동영상으로 저장되어 있었다. 사건은 마무리가 되었기에 모든 것이 끝난 줄 알았다. 그러나 어떤 언론에서도 교장의 이야기는 없었다. 그저 인터넷 신문 몇 군데서 고소 취하와 무고라는 몇 줄의 기사만 올라왔을 뿐이다. 지면 신문에서 교장의 이야기는 찾아볼 수 없었고, 방송 언론에서는 그 사건에 대한 이야기는 단 한마디의 언급도 없었다. 세상을 향한 승혁의 목소리는 묵음이었다. 들리지 않는 공허한 메아리였다.
승혁은 사용하지 않았던 SNS 계정을 만들어 자신의 이야기를 올렸지만, 귀 기울여주는 사람은 없었다. 아니, 올리고 두어 시간이 지나면 삭제되고 없었다. 삭제되지 않을 만한 개인 홈을 만들고, 그 글을 SNS에 링크하는 방법까지 동원해 봤지만, 그 링크마저 삭제당했다. 재단 측에서 교장의 일을 확대하지 않기 위한 술수라는 것을 나중에서야 알았다.

그가 갈 수 있는 곳은 없었다. 사람들은 그의 범죄 사실만 기억할 뿐, 무죄라는 것을 알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었다. 방송사와 언론중재위원회, 재단 이사장, 신문사 등 그가 찾아가지 않은 곳이 없었다. 모두 거절당했고, 불가능하다는 말만 들었을 뿐이다. 아내와 자식은 떠났고, 교사를 천직으로 알고 살았던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찾을 길이 없었다. 절망의 무게를 이겨 낼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차라리 처음 사건이 터졌을 때, 교장의 제안대로 그 학교를 박차고 나와 욕설 한마디 해주고 끝냈다면, 지금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흘러버린 물은 다시 상류로 끌어올릴 수 없다. 지나버린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다. 승혁은 마지막으로 노모의 얼굴이 보고 싶어 고향을 찾았다. 한적한 시골 마을에도 소문이 꼬리를 물고 퍼진 모양이다. 고향 집 대문과 벽에 빨간 페인트의 욕설들을 마주한 승혁은 차마 대문을 들어설 수 없었다. 안에서 인기척이 들리자 골목으로 몸을 숨겼다. 병원을 당신 집처럼 드나드는 노모는 손에 물통과 수세미를 들고 대문 앞에 섰다. 낙서를 닦으며 노모는 아마 마음의 눈물을 닦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옆집 젊은 여자가 대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아즈매요 이제 고만 하이소. 그이가 알아봤더니, 고소도 취하되고, 그 교장놈이 어린 학생 성폭행하고 그거를 울 선생한테 뒤집어 씌었다 그카데예. 사람들도 이제 금방 달라질겁니더. 그라니 이제 고만 하시소. 내일 그 이하고 같이 페인트로 확다마 칠해뿔랍니더"
"어데 갈데도 없을낀데, 밥은 묵고 댕긴다 카드나?"
"울 선생님 그래 찾아다녀도 흔적도 없다캅니더. 연락도 안되고예. 아고 아즈매요 그러다 병납니더. 어이 들어가시소."
"내가 전생에 죄를 많이 지었는갑제? 금쪽같은 내 새끼 어데가서 콱 죽어뿐거는 아니겠제?"
"아이고, 아즈매도 참말로 몹쓸 생각하지 마시소. 어매 땜시도 나쁜 생각 안 할낍니더"
승혁은 벽에 기댄 채 주저앉았다. 차마 노모의 얼굴을 마주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사람들의 인기척이 들리자 승혁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노모의 방에도 불이 켜졌다. 동이 떠오르는 시각이었다. 승혁은 승용차에 올라 한참을 눈을 감고 누워 있었다. 어디로 가야 할 것인가. 갈 수 있는 곳이 어디인가.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가 갈 수 있는 곳은 이 나라에는 없는 것 같았다. 어디를 간다한들 그 편견과 맞서 싸울 수 있는 용기가 이제 그에게는 남아있지 않았다.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했지만, 거대한 거인과 개미의 싸움처럼 느껴지는 무력함, 무능함, 존재의 가벼움이 그의 투지를 짓밟았다.
꺼두었던 핸드폰에 전원을 넣었다. 배터리가 거의 바닥이 난 상태였다. 몇 통의 문자를 무심히 열어보던 승혁은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가 시를 쓸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준 대학 은사님의 문자였다.
"고 선생, 소식은 들었네. 세상살이가 팍팍하지? 그래도 용기를 갖게나. 모든 것은 시간이 결정해 줄 걸세.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투지도, 절망도 아니라네. 그저 기다리는 용기라네."
시간이 흘러가고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그가 잊히기를 기다리라는 이야기다. 그러나 그가 뒤집어쓰고 있는 더러운 욕정의 선생이라는 오명은 시간이 지나도 벗어지지 않을 것이다. 잊힌다고 해서 그 오명이 씻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의 이름이 세상에 다시 회자 될 수 있는 방법은 단 한 가지밖에 없다. 오물을 뒤집어쓰고 사람들 사이에 섞여 있을 때, 누군가는 그 오물 냄새를 맡고, 다시 편견과 날카로운 시선에 벌거벗은 나 자신을 던질 수밖에 없다. 그 기다리는 용기마저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승혁의 차는 미끄러지듯 주차장을 빠져나가 고속도로를 향하고 있었다. 마지막 끈이었는지도 모른다. 세상과 작별하기 전 마지막 실오라기 같은 세상과의 연결 끈. 그러나 그 끈에 의지하기엔 이미 늦었다. 그가 몸부림칠수록 세상의 벽은 그를 향해 조여오고 있었다. 숨 쉴 공간조차 그에게 남아 있지 않았다. 세상과 단절되고 부질없이 고속도로를 질주하는 이 자그만 승용차 안의 공간만이 그가 유일하게 숨 쉴 수 있는 공간이다. 사람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유일한 공간.

노교수를 만난 것은 그날 저녁 무렵이었다. 학교 연구실에 있던 노교수는 승혁의 연락을 받고 학교 앞 카페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초췌한 승혁을 마주한 노교수의 눈빛은 측은함이 묻어 있었다. 그는 그 어떤 것도 묻지 않았다. 그저 지나간 추억을 되뇌며, 젊은 날 자신의 이야기를 늘어놓을 뿐이었다. 승혁은 그저 무심한 듯 듣고 있을 뿐, 어떤 미동도 하지 않았다. 노교수는 일어나며 웃었다.
"학생들의 웃음이라도 한 번 만나보게나. 눈앞에 희망이 가득 찬 그들의 웃음소리 말이야."
학교를 향하는 동안 둘은 말이 없었다. 학생들의 인사를 받으며 걷는 노교수 뒤로 승혁은 묵묵히 따라갈 뿐이었다. 어디선가 여학생들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승혁은 깜짝 놀라 웃음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를 주시하던 노교수는 학교 정원에 있는 벤치에서 발걸음을 멈추고 자리에 앉았다.
"자네를 비웃는 웃음소리로 들리지? 하지만, 저들은 자네를 모르네. 그리고 관심도 없네. 자네 마음속의 울림일 뿐이야. 자네가 극복해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이지. 자네는 떳떳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당당해지게. 그래야 어둠 속에서 자네를 응시하는 시선도 사라질 걸세."
"저 혼자 진실을 외친다 한들 그들의 시선은 그대로지요. 들으려고 하지도 않아요."
"세상에는 말이야. 아주 많은 생명이 살아가고 있네. 화려하게 무더기로 피어있는 저 국화꽃이 있는가 하면 그 화려한 그늘 밑에서 조용히 숨죽이며 피었다가 사라지는 꽃들도 있지. 뿐인가. 자네 발을 들어보게."
승혁은 딛고 있는 발을 들었다. 청보라빛 작은 풀꽃 하나가 그의 구둣발에 짓밟혀 짓이겨져 있었다. 승혁은 깊은 한숨을 내리쉬며 발을 다른 곳으로 옮겼다. 노교수는 다시 다리를 들어보라는 듯 손을 위로 까닥거렸다. 승혁이 다시 발을 들어 땅을 바라보았다. 몇 마리의 개미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모습이 보였다.
"가을비가 내릴 모양이네. 개미들이 줄지어 이동하는 것을 보면 말이야. 내가 그 번잡하고 시끄러운 도시에서 이 한적한 도시로 온 이유가 뭔 줄 아나? 다들 의아해했지. 아내마저도 나를 이해하지 못했거든. 그건 말이야 알려지지 않은 작은 사건이 있었네. 아니 나에게는 정말 중요한 사건이었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그냥 한 번 웃고 넘어갈 사건이었지. 나를 짝사랑하던 여학생이 있었네. 스토커였지. 내가 어떤 빌미를 제공했는지, 나는 아직도 모르지만, 그 여학생은 집요하게 날 괴롭혔지. 그 어떤 여학생에게 눈길조차 줄 수 없었네. 강의하다가 여학생을 보고 웃는 날이면 죽겠다는 협박 문자가 날아오기도 했었네. 참다 참다 스토커로 경찰에 신고하고 사건은 끝났지. 그런데 말이야, 나를 가장 잘 알고 있다는 사람들의 시선은 그게 아니었네. 내가 내가 믿고 있었던 사람들, 내가 명예라고 믿었던 것들이 모두 무너져 내리는 순간이었지.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어. 그때 어느 공원의 벤치에 앉아서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생각했었지.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눈을 떴을 때 내 시선에 들어오는 것이 하나 있었어. 그때가 2월 찬바람 불던 때였고 마치 눈이 내려서 온 세상이 하얗게 뒤덮인 날이었지. 그런데 바위 사이에서 자네가 짓밟았던 그 꽃이 보이더군. 눈을 뒤집어쓰고 꽃잎은 얼어 있는데도 고개 숙이지 않고 바위틈에서 살아보겠다고 발버둥 치는 것처럼 보이는 잡초꽃이 내 모습보다 더 훌륭했네. 나중에 찾아보니 개불알풀꽃이라고 하더군. 참 이름도 입에 담기 민망하지? 난 그 잡초꽃을 보며 생각했네. 사람들의 시선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 내 마음속에서 내가 외치고 있는 소리가 무서운 것이라고. 난 그 여학생의 그런 관심이 싫지 않은 내 마음의 진실을 발견했지. 늙은 사내에게 관심을 주는 젊은 여인의 열정이 싫을 리 없잖은가. 다만, 내 명예, 교수, 그리고 사회적 위치라는 그 허울이 그 젊은 여성을 경찰에 고소했던 것이지. 내가 생각했던 소중한 것의 가치가 달라진 걸세. 그래서 난 다 버리고 내려온 것일세. 가족과 떨어져 살면서 더 애틋해졌고, 여유로운 사람들의 시간 속에서 난 더 자유로워질 수 있었네. 내가 전부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하찮은 허울이라는 것을 알고 나니 자유롭더군. 지금 내가 하는 말이 자네 마음을 움직일 수는 없다는 것을 아네. 자네에 비하면 그저 해프닝에 지나지 않으니 말이야. 그러나 오늘 하루만이라도 희망을 놓지 말고 생각해 보게나. 자네가 지켜야 할 것이 무엇인지, 무엇이 자네에게 중요하고 소중한 것인지 한 번만 생각해 보게."
노교수의 말 그대로였다. 승혁은 그의 이야기가 그저 푸념처럼 들렸다. 그런 해프닝으로 가치관이 바뀌었다면, 그 가치관으로 자신의 자리를 지킬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그 해프닝으로 모든 것을 버릴 수 있는 것도 사치 아니겠는가. 승혁이 그런 생각을 하던 차였다. 노교수는 자리에서 일어나 승혁을 이끌었다. 밤늦도록 무슨 이야기가 그리 많은지 평소에 말이 없던 노교수는 승혁이 취할 때까지 떠들고 있었다. 호수 근처에 있는 호텔에 취해 잠든 승혁을 던져두고 노교수는 돌아갔다. 얼마나 잠들었던 것일까. 승혁이 눈을 떴을 때, 창밖 풍경은 고즈넉하기만 했다.

출렁이는 호수 물결에 달빛이 흔들리고 있었다. 반짝이는 은빛 물결에 이끌리듯 승혁은 외투를 입고 밖으로 나섰다. 수변을 따라 난 길은 고요했다. 늦은 밤이었던 탓일까 지나는 이는 없었고, 그저 제법 차가워진 바람만 호수에 앉았다가 물비린내를 안고 그의 품으로 달려들었다. 생을 마감하기에 딱 좋은 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요한 달빛, 출렁이는 물결, 신선한 바람, 물비린내, 그리고 조용히 출렁이는 호수의 물결. 내려놓으면 그뿐이다. 아무리 외쳐도, 발버둥을 쳐봐도 사람들은 그를 바라보지 않는다. 그저 뒤에서 수군거릴 뿐. 그가 가는 길마다 모두 벽으로 막혀있고, 벽들은 입이 생기고 그 입들은 칼날을 품고 그를 향해 달려들 뿐이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무력감이 절망의 무게 위에 올라앉았다. 어머니의 눈물이 그의 심장으로 파고들었다. 자신도 모르게 흘러내리는 눈물에 승혁은 멍하게 호수에 떠 있는 달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에도 달빛은 아름다웠다. 출렁이는 은빛 물결은 아름다웠다. 그때 그 옆을 휙 지나치는 검은 것이 있었다. 승혁은 깜짝 놀라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한참을 뛰어가던 검은 물체는 커다란 나무 밑둥치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승혁은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으나 발길을 옮길 수 없었다. 웅크리고 앉아 있는 검은 물체는 흐느꼈다. 들릴 듯 말듯 소리마저 죽인 심연의 고통 소리였다. 승혁은 조금 멀리 떨어진 나무 아래 앉아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 사연은 알 수 없지만, 고통의 무게는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일어서는 검은 물체가 여자라는 것을 알았다. 긴 머리카락은 바람에 흩날리며 땀 냄새와 섞인 엷지만 흐릿하게 장미향의 샴푸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승혁은 여인의 발걸음을 멀리에서 따라가고 있었다. 목적지가 없이 그저 달빛에 이끌려 나왔던 승혁은 그 여인의 목적지를 따라 자신도 모르게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렇게 한 시간쯤 걸었던 것 같다. 걷다가 멈춰서다 주저앉기를 반복했던 여인이 도착한 곳을 절벽이었다. 승혁은 멈칫했다.
'안 돼요. 그럼 안 돼요. 포기하지 말아요. 아직 어딘가에 희망이 있을 거예요.'
승혁은 외쳤다. 그러나 목소리는 이미 목구멍으로 삼켜졌고, 그저 간절한 팔의 허우적만이 그녀를 향해 있었다. 그녀는 절벽에서도 한참 생각하는 듯했다. 승혁은 조용히 그녀 가까이 다가가 나무에 몸을 숨겼다. 그녀가 뒤돌아서서 돌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해졌다. 자신의 밑바닥 저 심연의 골짜기에서 승혁 스스로 찾지 못한 자신을 향한 외침이라는 것을 승혁은 그때야 깨달았다. 그녀는 아슬아슬 절벽 끄트머리로 발걸음을 옮겼다. 승혁은 나무에 기대고 있던 몸을 일으켰다. 간절하게 그녀를 잡고 싶었다. 뛰어내리지 않게 세상과 이별을 하지 못하도록 잡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발걸음을 옮기려 할 때, 다시 검은 물체가 불쑥 그의 앞을 가로질러 그 여인에게 다가가 팔을 잡아끌었다. 승혁의 귀에 쟁쟁한 울림이 생겼다.
"살아야 진실이 알려지는 거잖아요. 이대로 가면 소문이 사실이 되는 거잖아요. 소문이란 잠시 시간이 필요할 뿐이에요. 그다음에는 그 누구도 누나의 삶에 관심을 두지 않아요."
그녀는 주저앉아 멀뚱멀뚱 사내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 외침이 귀에 닿지 않는 모양이다. 사내는 그녀를 끌었지만, 그녀는 걸을 의지조차 없었다. 사내가 여인을 등에 업었다. 승혁은 그들이 가는 방향을 따라 걸었다. 인기척이 들리지 않을 만큼의 먼 거리에서 그들에게 시선을 놓지 않았다. 스산한 바람이 그의 몸으로 파고들었다. 현실은 냉정하고 시리다.

자신의 외침을 들은 승혁은 다시 서울로 올라갔다. 살겠다는 의지를 이미 확인했다. 그 무엇이라도 해야 했다. 노모의 병원비를 벌어야했고, 세상에 대한 편견과 맞서 싸워야 했다. 딸 지민을 만나는 방법은 그것밖에 없었다. 살아 있어야 진실을 밝힐 수 있다는 말이 그가 지칠 때마다 귓가에 쟁쟁거렸다. 이미 밝혀졌지만, 세상에 알려지지 못하는 진실. 침묵한다면 그대로 진실이 될 수밖에 없다. 승혁은 다시 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동원했다. 먹고 살아야 했기에 사립 고등학교나 중학교 국어 선생 자리를 찾았으나, 편견의 벽에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그를 원하는 곳은 없었다. 몇 군데 문화센터를 전전했다. 될 수 있으면 그가 예전에 살던 동네와 먼 곳에 있는 문화센터 강사로 일했지만,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그를 따라다니는 '제자 성추행 교사'라는 꼬리표를 뗄 수 없었다. 동네를 옮겨봐도 떼어지지 않는 꼬리표. 소문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어린 학생들까지 무차별 강간했던 사람이 문화센터 강사? 말도 안 되는 소리지."
강의 계획서를 들고 찾아갔던 경기도 어느 소도시의 주민자치 문화센터에서 들었던 소리다. 그날 밤이었다. 임시로 묵고 있는 모텔에 양복을 입은 몇 사람이 찾아들었다. 그들이 내민 명함을 받아든 승혁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재단에서 나온 사람들이었다.
"아직 분노가 남아 있는 모양입니다. 그러나 고 선생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고 선생이 뭔가 하려고 발버둥 칠수록 더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 것입니다. 저희가 제안하는 것을 받아들인다면 놓아 드리죠. 아무것도 하지 마십시오. 그 어떤 언론, 인터넷, SNS 등에 진실을 알리겠다 설치지 말란 말입니다. 해외로 도망치는 것도 포기하십시오. 고 선생이 모든 것을 포기할 때까지 우리의 관리는 지속할 것입니다. 제안 하나 드리죠. 아주 작은 시골 동네에서 무명으로 사십시오. 수도권을 벗어나 멀리 떨어진 산골에서 조용히 사신다면 저희도 더는 간섭하지 않겠습니다. 그 사건에 대해 더는 어떤 것도 하지 않겠다는 포기 각서에 도장을 찍어주시면, 그곳에서는 좀 편안해질 수 있을 것입니다."
"도대체 재단에서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뭡니까? 교장이 재단에서 어떤 존재이길래."
"그것까지는 아실 필요 없습니다. 다만, 재단에 꼭 필요한 분이라고만 해두죠."
승혁은 입술을 깨물었다. 더는 발버둥 칠 수 있는 여건이 되지 않았다. 그들은 승혁이 자살을 선택할 것이라 확신했었고, 그것이 틀어지자 그가 나갈 수 있는 길을 모두 차단했다는 것을 그들의 표정이나 언뜻 내비치는 단어로 짐작할 수 있었다. 우선 살아 있어야 했다. 승혁은 깨문 입술에서 피가 흘러내릴 정도로 꽉 물었다. 그들이 건네는 볼펜을 들고 내미는 문서를 읽었다. 두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거대한 바위에 부딪힌 개미였다. 그들의 손톱으로 언제든지 짓이겨버릴 수 있는 한낱 미물에 지나지 않은 개미. 승혁은 그들 보는 앞에서 사인과 지장을 찍었다. 회심의 미소를 짓던 그들은 자그만 가방 하나를 놓고 사라졌다. 다시 서울로 올라온 지 딱 1년이었다. 그의 삶의 의지도 다시 무너지는 것 같았다. 승혁은 그다지 정리할 것도 없는 짐을 정리해 무작정 군산으로 내려갔다. 그가 마지막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도시였다.

그는 살아야 했다. 그러나 승혁은 돈은 받을 수 없었다. 그것은 마지막 자존심과도 같았다. 추악한 뒷거래. 그 돈으로 생을 연명하고 있다는 그 자체가 더 치욕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는 배부른 소리라고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누군가의 오명을 대신 끌어안는 대가를 받는다는 자체가 그를 용납하지 않았다. 딸 아이와 떠나는 아내에게 재산의 일부를 넘기고 조금 남아있던 재산을 정리해서 진실을 밝히고자 뛰어다니는 경비로 사용해 버렸다. 당장 굶을 일은 없겠지만, 봄이 되기 전에 무엇인가 해야 한다. 빌라 입주 보증금마저 노교수의 도움을 받았다. 대학에서 운영하는 평생 교육원에 시 창작반을 하나 개설하기는 했지만, 그것으로는 생활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안다. 월요일 아침 3시간 수업, 목요일 저녁 3시간 수업. 그것 말도 다른 일거리를 찾아봐야 할 것 같다. 이곳에도 자치센터에서 운영하는 문화센터가 있다는 것을 안다. 아무리 시골이라 할지라도 아직 그를 받아줄 만한 곳은 없다. 평생 교육원에 시 창작반을 개설할 수 있었던 것도 노교수의 입김이 있었고, 보증이 있었다는 것은 확인하지 않고도 알 수 있다. 개강하게 되면 또 한 차례의 바람이 불 것이다. 그 바람과 맞서 싸워야 하고 그 결과는 어찌 될지 아무도 모른다.
승혁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심호흡을 크게 했다. 어느새 밤공기가 많이 달라졌다. 오늘은 그날처럼 은은한 달빛도 없다. 잔잔한 물결 소리만이 그의 조용한 발걸음을 따라오고 있었다.
'그 여인 집이 이 근처인 것은 맞는데, 이 숲길로 들어가는 것까지는 봤는데…. 누구였을까.'
처음 이사 온 날부터 그래도 젊다고 생각되는 여인들을 눈여겨봤다. 긴 머리의 여인은 아직 찾지 못했다. 그때 물비린내와 땀 냄새와 섞여있었지만, 분명 장미 향의 삼푸 냄새였다. 그 비슷한 향기도 찾지 못했다. 그 호기심이 다시 그를 군산으로 이끌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노교수라는 인맥이 그를 이곳으로 인도했다고 하기엔 무엇인가 부족했다. 아예 아무도 모르는 작은 섬이나 바닷가 마을을 선택했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날 밤. 승혁보다 더 간절함을 가졌던 한 여인. 모든 것을 내려놓기 위해 절벽을 찾았고, 내려오는 내내 삶의 의지라고는 없어 보였던 그 여인. 그 여인은 정말 세상을 포기해 버린 것일까. 보이지 않는다. 비슷한 그림자도 찾을 수 없다. 승혁은 긴 한숨을 내리 쉬었다.
그 여인이 살아있다면 그도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조용하지만 처절하고 절실한 그 몸부림. 그의 마음을 대변해 주는 듯 먼저 절벽 앞에 섰던 그 여인. 자신의 마지막을 보는 양, 간절하게 막고 싶었던 그녀의 마지막 결정. 그래서 그녀가 궁금했다. 그녀가 밝고 신나게 살고 있다면, 그도 그렇게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날 그 여인은 자신의 모습이었으므로….
승혁은 대문을 열고 들어가기 전, 옆집 옥탑방을 흠칫 바라보았다. 묘한 분위기의 여인이다. 몇 번 마주쳤지만, 그때마다 그녀의 분위기가 달랐다. 언제나 무표정하고 웃음기 없는 얼굴에 삶의 생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지만, 며칠 전 카페에서 그녀의 입가에 흐르는 엷은 미소를 봤다. 모나리자의 미소를 닮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할 일 없는 여자의 게으른 일상처럼 보이기도 하고, 어느 날은 세상을 달관해 버린 사람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사람 살아가는 것은 분위기나 흐름이 있는 모양이다. 도심지의 치열한 일상 속에서는 이렇게 여유로움이 없었다. 당장 진실을 밝히지 않으면 세상이 무너질 것 같았다. 아니 더러운 인분을 뒤집어쓴 자신을 향해 모두 손가락질하는 것 같았고, 다들 치열하게 살아가는 가운데 자신만 점점 저 밑바닥으로 곤두박질치는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오명을 벗을 수 있는 희망 자체가 사라져 버린 탓일까. 아니면 이 여유로운 작은 도시의 분위기나 흐름 탓일까. 자신이 뒤집어쓴 그 오물만 없다면 그냥 이렇게 여유로움 속에서 한적한 오후를 만끽하고, 달빛도 없는 어둠마저도 포근함에 젖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치열하게 살지 않아도 그들의 웃음 속에서 그 또한 웃으며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작은 도시에도 그의 이야기는 퍼져갈 것이다. 그때 태풍이 한차례 불어오리라는 것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제 더는 물러설 곳도 없다. 얼굴에 두꺼운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수밖에 없다.
주인 노파가 하숙하는 학생들의 저녁을 챙기며 오가는 분주한 모습이 보였다. 승혁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하숙생들의 저녁 식탁이 있는 곳에 서 있었다. 벌써 누군가는 그의 모습을 보더니 흠칫 놀라고, 누군가는 수군거렸다. 노파와 승혁의 눈이 마주쳤다.
"고 씨! 안 그래도 고 씨랑 이야기 좀 할라고 했당께.  어째 조용한데로 갈텨?"
"어떤 말씀 하실지는 압니다. 여기 학생들 있는 자리에서 제가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고 씨 오기 전에 그랑께 그 교수님한티 대충 말은 들었응께. 나도 교수님 믿고 방을 내주기는 혔는디, 학생들이 하두 말이 많은께, 나도 쪼감 난감혀"
"신문이나 방송에서 시끄럽게 떠들었던 그 고등학교 교사 맞습니다. 그 사건은 무죄로 판결이 났고, 진짜 범인도 잡혔습니다. 다만, 제가 덤벼들 수 없는 존재가 진짜 범인이 세상에 드러나지 않도록 막았던 탓에 사실이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을 뿐입니다."
여기저기서 학생들이 수군거렸다. 누군가는 핸드폰을 검색하기도 하고, 누군가는 못 믿겠다는 듯 고개를 젓기도 했다. 노파는 손짓했다. 의자에 앉으라는 손짓이었다. 승혁은 노파가 건네는 커피잔을 손으로 움켜쥐었다.
"그랑게 그랬담서. 나도 믿고는 싶은디.... 아니어, 아니어 믿을 것잉만. 아야 긍께 느그들도 어만 소리 허지 말고 믿어봐야. 너나 나나 돈 없이 사는 것은 같은께 언제 내가 당할 수도 있는 거 아니것어?"
"할머니 옆집 아줌마 사건 때문에 말 아끼시는 거죠?"
"어따 썩을 년, 너는 졸업반 아니냐?"
"졸업 유보해서 한 학기 더 다닐 거예요."
그때였다. 누군가 소리쳤다.
"찾았다. 학생이 고소 취하, 무고로 밝혀졌고, 같은 학교 다른 교사가 진범인 것으로 경찰 조사에서 밝혀졌다. 그런데 무슨 기사가 이렇게 간단해요? 진짜 무슨 가십거리 정도밖에…. 혹시 이 기자를 매수한 것 아니에요?"
"그 기자도 그 몇 줄의 기사 때문에 아직 다른 기사 제 이름으로 내지 못하고 있을 거야. 일 전에 그 기사를 정확하게 써달라고 부탁하느라 전화했다가 알게 됐지. 그 이후에 그 기자의 기사 있는지 확인해 봐. 그럼 알 거야."
"정말이네요? 그 이후 두어 편의 기사가 있긴 하지만, 다음 날 기사이고 그 이후에는 없네요?"
다들 수긍하는 눈빛이었다. 그때였다. 어느 남학생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의자를 신경질적으로 밀어제쳤다.
"이름도 없는 인터넷 신문일 뿐이야. 친한 친구였을지도 모르지. 요즘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그런 억울한 일을 당하고 가만있는 사람이 어디 있어? 그리고 대한민국 기자들이 다 썩어 빠진 기자들이라는 거야? 말도 안 되잖아? 제자 성추행 교사니까 학교 복직도 안 되고 원래 살던 곳에서 살지 못하고 도망쳐 온 거겠지. 할매, 저 아저씨가 나가지 않겠다면, 저 방 뺄 거예요. 그렇게 아세요!"
"아가, 낼 레가 개학이여. 인자 하숙방 구하기는 힘들 것인디?"
"그건 제가 알아서 해요."
남학생은 식당 문을 거세게 닫고 자신의 방으로 사라졌다. 식사를 마친 학생들도 하나둘씩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노파와 승혁은 어색하게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노파는 곤란한 표정으로 승혁을 바라보고 있었고, 그는 그저 고개만 떨구고 있었다. 순조롭게 해결될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지만, 뭔가 씁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죄송합니다. 저 때문에 곤란하시게 된 것 같아서, 하지만 저에게 시간을 주세요. 분명 시간이 지나면 사람들도 제 과거가 아닌 오늘 이곳에 사는 저를 봐 줄 것이라 믿습니다. 그러니…."
"그거는 그 교수님하고 약속했던 거니께 괜찮으니 걱정 마소. 나도 인자 아그들 하숙 치는 것도 힘에 부쳐. 그래서 학생 수 줄이려던 참이라우. 작년에 그 일만 아니었으믄 내가 앞장  서서 고 씨 나가라고 혔을 것인디, 요노매 혓바닥이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고 생각허니께 인자 말이 무섭고만. 근디, 그 말 헐라고 여그까지 온 것은 아닌 거 같은디?"
"아, 혹시 막일이라도 할 곳이 없나 여쭤보고 싶어서요."
"막일이라…. 아! 그려그려, 거 옆집 성희네 아부지가 시골서 푸성귀나 과일 가져다가 농산물 시장에 내다 파는 일을 허는디, 전부터 일 손이 부족하다고 사람 좀 구해 달라고는 허드만, 아그들이 허는, 거 아…. 머시라고 했는디…. 그거라도 할 사람 있으면 말해 달라고."
"아르바이트 말씀이세요?"
"응, 그랴그랴. 옆집 1층에 세 들어 사는 사람 있제? 전에 새벽에 차 빼달라고 악쓰던 여편네. 그 여편네 서방이 사람 구해 달라고 했응께 낼 아침에 물어 보면 될 것이여. 근디 암만 봐도 그런 험한 일 안해 본 사람 같은디 헐 수 있것어?"
"제가 지금 더운 밥, 찬밥 가릴 때가 아니라서요. 감사합니다. 내일 여쭤보겠습니다. 그리고 믿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아녀 아녀, 그런 말 허지 말드라고. 인자 나도 말 무서운 것을 알았응께. 나중에 발등 찍히드라도 믿고 볼 것이여."
"예, 예 감사합니다."
승혁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식당 문을 닫고 나오며 얼굴이 화끈거린다는 것을 알았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얼굴에 철판을 깔고 당당하게 맞서리라, 침묵하지 않고 당당하게 그 사건을 이야기하리라. 교장을 거론하지 않고, 자신의 무죄만 이야기하는 것은 괜찮다 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평소에도 필요한 말 이외에는 하지 않는 경상도 남자. 자신을 변명하고 고개를 조아려야 한다는 것이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쉬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박차고 일어나 떠들던 남학생의 멱살을 붙잡고 뺨이라도 한 대 날려주고 싶었다. 그러나 이곳은 그가 정착해야 할 곳이다. 이곳에서 포기한다면 이제 더는 갈 곳이 없다. 승혁은 계단 앞에 섰다. 낮은 계단이었지만, 오를 힘이 남아 있지 않은 것 같았다. 등 뒤에서 그 남학생이 그를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마당을 가로질러 오며 얼핏 느꼈다. 승혁은 계단 난간을 손으로 붙잡고 후들거리는 다리에 힘을 주었다. 낯설다. 그렇게 나약한 자신의 모습이 낯설게 느껴졌다.
'이제 더 물러설 수 없어. 이곳에서 적응 못 한다면 내가 가야 할 곳은 없어. 무엇이든 붙잡아야 해. 필요하다면 여자라도 끌어안고 웃음을 팔아야 해. 몸이라도 팔아야해. 난 이제 그 무엇도 남지 않은 밑바닥이야. 버텨야 해. 자존심이 무슨 소용이야. 웃자. 억지로라도 웃자. 항상 내가 말하지 않았던가. 힘겨울수록 억지로라도 웃어보라고, 우는 얼굴은 누구나 피할 수밖에 없다고. 나도 힘겨운데 다른 사람에 슬픔까지 끌어안고 갈 사람은 세상에 가족 이외에는 아무도 없다고. 난 가족도 없잖은가. 그래 웃자."
승혁은 자신의 방문을 열었다. 어둡다. 빛 한줄기 들어오지 않는 어둠이다. 가끔 옆집 옥탑방 불빛이 그의 창문으로 세어 들어오곤 했지만, 오늘은 어둠이었다. 승혁은 창문을 열어 고개를 올려다보았다. 옥탑방 불이 꺼져 있다. 방금 그 여인이 방으로 들어가는 것 같았는데, 그 방의 불은 켜지지 않았다. 벌써 잠든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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